
| 기간 | 2002.03.23 ~ 2002.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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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 아트선재미술관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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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개요
*보문호 신라유물 발굴현장, 2002. 3. 30 - 6. 30 - 아트선재미술관 앞 힐튼호텔 부근 (아트선재미술관 도보 10분) *백곡리 이서국유물 발굴현장, 2002. 4. 6 - 6. 30 - 경북 청도군 화양읍 백곡리 김일손가(家) 정자
역사적 상상을 뒤집기: 조덕현의 프로젝트 "이서국(伊西國)으로 들어가다" | 이영준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은 역사를 사실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기록과 자료, 증거들에 단단히 정박되어 있다. 롤랑 바르트는 "역사의 담론"에서 이에 대해 다음처럼 표현한다. "사실주의 소설, 개인들의 일기, 다큐멘터리 문학, 뉴스 기사, 역사박물관, 과거 유물의 전시와 같은 특수한 장르들의 발전에서, 특히, 재현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바 있음을 의미하는 것을 그 유일하고 독특한 특징으로 하는 사진 기술의 거대한 발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문명은 실제효과에 대한 애착을 보인다. 지어낸 이야기(신화와 최초의 서사시들)로 들끓는 가마솥 안에서 최초로 발전되어 나왔던 내러티브 구조는 실제의 기호이자 증거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믿는다'. 역사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우리 눈으로 목격하지 않은 이러저러한 사건들이 실제로 발생했다고 여기는 정도까지 이른다. 역사적 진실을 찾기 위해 우리는 증거의 더미를 파헤치기도 한다. 역사적 발굴은 일정한 방향을 갖고 있다. 그 방향을 따라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며 땅 속 지층 구조 깊숙이 숨겨진 진실을 발견한다. 이 때 땅은 기록과 자료들이 보관된 진열장이다. 발터 벤야민이 "역사철학테제"에서도 지적했듯이 우리는 마치 역사의 천사처럼, "일련의 사건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곳에서" "잔해 위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의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을 바라볼" 수만 있을 따름이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하고, 죽은 자를 불러 일깨우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는 이를 다시 결합시키고 싶어한다.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여기서, 폭풍은 유일무이한 진실의 체계로서 시간의 흐름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의 힘이다. 이 힘이 역사에 대한 대안적 상상을 배제하는 것처럼, 역사의 천사에게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결국 천사는 잔해 더미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 잔해 더미가 의미하는 것은 역사의 목격자이자 역사적 지식에 대한 최상의 원천이라는 모습을 한 온갖 종류의 지식과 자료 일체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역사를 구성하는 다른 방법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가 아닐까. 만약 우리가 역사적 상상의 경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린다면, 모든 역사적 확실성들과 사실들은 단순한 상상의 상태가 되어 버릴 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역사란 사실 혹은 진실의 모습으로 위장한 상상의 한 형식일 뿐이라는 점이 최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전은 역사가 단순히 내러티브들의 집적이라는 포스트모던 역사가들의 주장을 유념해 볼 때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를 파헤치는 대신 미래를 파헤치고 있다. 파헤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먼저 우리는 땅에 묻는다는 말의 의미를 물어야 할 것이다. 땅에 묻혀 있는 것만을 파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묻는 것도, 파내는 것도 양쪽 모두 역사적 내러티브의 시작 기점은 아니다. 그 내러티브 안에 있는 매듭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이것들을 고정불변의 진실로 물화되지 않도록 구원하는 것은 상상력이 동원된 창조적 재구성이다. 바로 이것이 작가 조덕현의 이서국(伊西國) 프로젝트가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청동기 및 철기 시대에 경상북도 청도군에 존재했던 것으로 믿어지는 작은 나라, 이서국에 대한 전설을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조덕현을 중심으로 시인과 고고학자, 문헌학자 등의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협동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의 중심 컨셉은 시인 서림의 상상에서 시작된다. 서림은 자신의 시집 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에서 이 부족 국가에 대한 역사적 환상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가 과거에 대한 단순한 환상으로만 그쳤다면 조덕현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시인은 예비군 훈련장, 일상 생활, 텔레비전 수상기 등의 장면을 통해 과거에 대한 내러티브와 청도군 사람들의 현재 삶을 연결시켜놓았고, 그 때문에 조덕현은 이서국과 현대적 삶의 형식을 이어줄 연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덕현이 발견해 낸 연결의 형식은 매장과 발굴이다. 실제로 이 프로젝트가 보여주리라 기대되는 것은 땅에 무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그를 돕기 위해 프로젝트 참여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목격된 발굴의 장면과 결과물이다. 청도군 백곡리와 경주의 보문 호수 지역에 조덕현은 개의 모양을 한 여러 개의 형상을 묻는다. 나중에 영남대학교 발굴 팀이 이 형상들을 파낸 후, 이에 대한 방대한 수량의 발굴 보고서를 작성할 것이다. 얼핏 보아서는 영남대학교에서 제출한 가장 마지막 보고서가 이 프로젝트의 정점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프로젝트의 전 과정을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야 한다. 고대인들에게 무언가를 매장한다는 것은 죽은 자와 산 자, 땅과 하늘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을 의미했다. 죽은 사람이 천당에 이르는 길을 무사히 찾도록 도와줄 것이란 믿음에서, 그 사람이 생전에 쓰던 유품을 넣어 매장하곤 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매장은 여기서 초월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고대의 매장 풍습에서 이 아이러니는 천당과 지옥에 대한 믿음 속에서 초월되었다.
매장을 위해 땅을 파면서도 동시에 하늘을 갈망한다는 옛날 사람들의 이런 아이러니는 이서국 프로젝트에서는 그리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미래의 위치로부터 과거를 상상한다는 것이 이미 허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 세계에서 그러한 초월은 이미 그 효력을 잃었다. 대신 우리는 측정, 조사, 증거, 논리, 이성, 과학을 갖고 있다. 고대인들의 초월적 꿈에 내재된 광기의 어둠은 이성과 과학의 밝음에 의해서 축출 당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환상 역시 추방당했다. 환상의 원래 모습 그대로를 복원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될 때, 예술가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그 초월을 원래의 모습대로가 아니라 현대적 삶의 문맥 안에서 그가 상상할 수 있는 형태로 흉내내는(simulate)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발굴 장비들을 동원해서 땅을 파고, FRP 재질로 만들어진 개의 형상을 묻고, 영남대학교 발굴팀으로 하여금 묻혀있는 개의 형상들로부터 정보를 얻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인위적 고고학(artificial archaeology)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지층들 속에 숨겨진 의미의 층들이 인위적으로 놓여졌다는 의미에서 이 고고학은 인위적이다. 이런 행위들에서, 매장은 더 이상 초월적이지 않다. 그 안에서 발견될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사실, 이 프로젝트와 관련된 모든 것은 허구이다. 그러나 땅에서 발굴된 `역사적 증거'와 결합됨으로써, 그것은 철두철미한 진실까지는 아닐지라도 좀더 신빙성 있는 무엇이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허구적 역사를 직면하게 된다. 이 역사의 결정적인 증거는 영암(2000)과 경주 및 청도(2002)에서 발견된 개 모양의 철제 유물이다. 그는 파리의 주 드 폼므(Jeu de Paume)에서도 유사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이러한 발견들의 연속이 작가로서의 조덕현의 최근 족적을 채우고 있다. 현대 예술에서 작가가 어떤 생각을 담은 복잡한 설치작업을 기획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조덕현의 경우에서, 작가는 물질적 증거에 기반한 허구를 지어냄으로써 역사적 내러티브에 대한 대안을 찾는다. 영국의 역사가 스티븐 밴(Stephen Bann)이 자신의 저서 클라이오의 옷 입히기(the Clothing of Clio) 에서 언급했듯이, 19세기 실증주의에 토대를 둔 역사는 역사적 내러티브의 수사들의 다양성을 사실과 실제적인 것으로만 축소시켜 버렸다. 실증주의적 역사 이전에, 역사적 수사들은 전설과 연극, 소설, 신화 등과 같은 장르들을 두루 아우를 만큼 다채로웠다. 클라이오는 역사의 여신이다. 밴에 따르면, 클라이오의 옷들은 역사의 풍부한 수사들을 누르고 오로지 사실적 국면들에만 특권을 부여한 실증주의적 역사의 도래와 함께 형편없이 빈곤해졌다. 허구와 가짜 매장과 발굴이라는 형식을 이용함으로써 이서국 프로젝트는 역사적 과거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일깨우고자 시도한다. 그렇다면 그 경우, 이 과거는 누구에게 그 전모를 드러내게 되는가? 물론, 그것은 전체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총괄하는 책임을 맡은 작가 자신이다. 그러나 그는 이 프로젝트에서 전개된 모든 것들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유리한 지점에 서 있는가? 작가라는 위치는 자동적으로 그에게 시각의 권위를 보장하는가? 조덕현이 이서국 프로젝트에서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유리한 시점은, 그가 허구와 실재, 과거와 현재, 매장과 발굴 사이의 공간 어딘가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시점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이 프로젝트에서는 누구도 모든 것을 다 바라볼 수 있는 시점에 있다고 내세울 수 없다. 역사적 진실은 어떤 단일한 시점에도 속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작가는 여기서 발굴하는 사람이며, 진실을 마음대로 다루는 사람은 아니다. 그 결과로, 이서국이라는 허구의 왕국은 되살아난다. 롤랑 바르트가 저자는 죽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작가는 죽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 뿐이다. 그는 발굴터에서 파낸 의미의 잔존물들을 포착할 뿐이다. 그것들이 발굴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므로, 상상의 지역성은 아주 중요하다. 세 군데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발굴에서, 이서국의 내러티브는 현재 거기서 발견되는 사물들 속에 뿌리 박고 있다. 땅에서 파낸 철제의 개형상 뿐 아니라,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것은 더 있다. 그들 중의 하나가 이서국을 외부의 침입자들로부터 막아주었을 것으로 믿어지는 토성이다. 그것들은 바르트가 `실제효과'라고 부른 것을 강화한다. "`객관적인 역사'에서, `실재'는 아직 형상화되지 않은 기표일 뿐이며, 그것들은 겉으로 볼 때에는 아주 강력한 지시물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다. 우리가 실제효과라고 부르는 것을 특징 짓는 것은 이런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개념을 위해서 실제효과에 의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역사를 결을 거슬러서 읽을 것이다. 실제효과는 증거와 사실의 수준에 강하게 묶여 있으므로 그런 역사의 개념에 도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역사의 기표의 구축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의가 주어져 있을 때는 너무 늦는데, 기의는 기표의 구축이 다 끝난 다음에야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생각하는 다른 방식을 추구하는 상상력은 정당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세 가지 다른 장소에서 파낸 물건들은 증거가 아니라 역사의 굴곡진 경로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 볼 수 있는 계기들이다. 이 경로에 대해서는 바르트의 힌트를 빌려 보자. "역사적 담론은 실재를 따르지 않으며, 실재를 단지 표상(signify)할 뿐이며, 그런 일이 실재로 벌어졌다고 계속 되풀이하지만 이런 주장은 역사적 나레이션의 전과정의 표상된 `다른 측면'에는 절대로 도달하지 못한다." 결국, 조덕현이 다루고 있는 것은 역사의 실재라고 내세우는 의미화의 과정이다. 이서국 프로젝트는 역사적 상상력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 의미화의 물질적인 국면을 다룰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FRP로 된 개의 형상, 굴삭기로 파낸 흙, 그러면서 흘린 땀 등, 이 프로젝트에 동원되는 모든 재료와 물질들은 이서국의 역사적 나레이션의 잔존물들이다. 그것들은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 어딘가에서 비꼬여 있는 기묘한 역사적 개념 속에 재구축되어 있다. 이 비꼬임은 쉽사리 풀기 어려워 보이므로, 이서국 프로젝트는 관객에게는 난해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피로젝트의 시각적이고 텍스트적인 국면을 겪어 나가는 와중에서 관객이 단일한 시간의 개념으로부터 벗어날 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 다음 단계는 이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서국에 대한 허구적, 사실적 세부사항들은 이미 주어져 있지만 관객으로서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다.
전시개요
*보문호 신라유물 발굴현장, 2002. 3. 30 - 6. 30 - 아트선재미술관 앞 힐튼호텔 부근 (아트선재미술관 도보 10분) *백곡리 이서국유물 발굴현장, 2002. 4. 6 - 6. 30 - 경북 청도군 화양읍 백곡리 김일손가(家) 정자
역사적 상상을 뒤집기: 조덕현의 프로젝트 "이서국(伊西國)으로 들어가다" | 이영준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은 역사를 사실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기록과 자료, 증거들에 단단히 정박되어 있다. 롤랑 바르트는 "역사의 담론"에서 이에 대해 다음처럼 표현한다. "사실주의 소설, 개인들의 일기, 다큐멘터리 문학, 뉴스 기사, 역사박물관, 과거 유물의 전시와 같은 특수한 장르들의 발전에서, 특히, 재현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바 있음을 의미하는 것을 그 유일하고 독특한 특징으로 하는 사진 기술의 거대한 발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문명은 실제효과에 대한 애착을 보인다. 지어낸 이야기(신화와 최초의 서사시들)로 들끓는 가마솥 안에서 최초로 발전되어 나왔던 내러티브 구조는 실제의 기호이자 증거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믿는다'. 역사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우리 눈으로 목격하지 않은 이러저러한 사건들이 실제로 발생했다고 여기는 정도까지 이른다. 역사적 진실을 찾기 위해 우리는 증거의 더미를 파헤치기도 한다. 역사적 발굴은 일정한 방향을 갖고 있다. 그 방향을 따라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며 땅 속 지층 구조 깊숙이 숨겨진 진실을 발견한다. 이 때 땅은 기록과 자료들이 보관된 진열장이다. 발터 벤야민이 "역사철학테제"에서도 지적했듯이 우리는 마치 역사의 천사처럼, "일련의 사건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곳에서" "잔해 위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의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을 바라볼" 수만 있을 따름이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하고, 죽은 자를 불러 일깨우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는 이를 다시 결합시키고 싶어한다.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여기서, 폭풍은 유일무이한 진실의 체계로서 시간의 흐름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의 힘이다. 이 힘이 역사에 대한 대안적 상상을 배제하는 것처럼, 역사의 천사에게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결국 천사는 잔해 더미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 잔해 더미가 의미하는 것은 역사의 목격자이자 역사적 지식에 대한 최상의 원천이라는 모습을 한 온갖 종류의 지식과 자료 일체이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역사를 구성하는 다른 방법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가 아닐까. 만약 우리가 역사적 상상의 경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린다면, 모든 역사적 확실성들과 사실들은 단순한 상상의 상태가 되어 버릴 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역사란 사실 혹은 진실의 모습으로 위장한 상상의 한 형식일 뿐이라는 점이 최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전은 역사가 단순히 내러티브들의 집적이라는 포스트모던 역사가들의 주장을 유념해 볼 때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를 파헤치는 대신 미래를 파헤치고 있다. 파헤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먼저 우리는 땅에 묻는다는 말의 의미를 물어야 할 것이다. 땅에 묻혀 있는 것만을 파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묻는 것도, 파내는 것도 양쪽 모두 역사적 내러티브의 시작 기점은 아니다. 그 내러티브 안에 있는 매듭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이것들을 고정불변의 진실로 물화되지 않도록 구원하는 것은 상상력이 동원된 창조적 재구성이다. 바로 이것이 작가 조덕현의 이서국(伊西國) 프로젝트가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청동기 및 철기 시대에 경상북도 청도군에 존재했던 것으로 믿어지는 작은 나라, 이서국에 대한 전설을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조덕현을 중심으로 시인과 고고학자, 문헌학자 등의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협동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의 중심 컨셉은 시인 서림의 상상에서 시작된다. 서림은 자신의 시집 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에서 이 부족 국가에 대한 역사적 환상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가 과거에 대한 단순한 환상으로만 그쳤다면 조덕현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시인은 예비군 훈련장, 일상 생활, 텔레비전 수상기 등의 장면을 통해 과거에 대한 내러티브와 청도군 사람들의 현재 삶을 연결시켜놓았고, 그 때문에 조덕현은 이서국과 현대적 삶의 형식을 이어줄 연결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덕현이 발견해 낸 연결의 형식은 매장과 발굴이다. 실제로 이 프로젝트가 보여주리라 기대되는 것은 땅에 무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그를 돕기 위해 프로젝트 참여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목격된 발굴의 장면과 결과물이다. 청도군 백곡리와 경주의 보문 호수 지역에 조덕현은 개의 모양을 한 여러 개의 형상을 묻는다. 나중에 영남대학교 발굴 팀이 이 형상들을 파낸 후, 이에 대한 방대한 수량의 발굴 보고서를 작성할 것이다. 얼핏 보아서는 영남대학교에서 제출한 가장 마지막 보고서가 이 프로젝트의 정점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프로젝트의 전 과정을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야 한다. 고대인들에게 무언가를 매장한다는 것은 죽은 자와 산 자, 땅과 하늘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을 의미했다. 죽은 사람이 천당에 이르는 길을 무사히 찾도록 도와줄 것이란 믿음에서, 그 사람이 생전에 쓰던 유품을 넣어 매장하곤 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매장은 여기서 초월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고대의 매장 풍습에서 이 아이러니는 천당과 지옥에 대한 믿음 속에서 초월되었다.
매장을 위해 땅을 파면서도 동시에 하늘을 갈망한다는 옛날 사람들의 이런 아이러니는 이서국 프로젝트에서는 그리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미래의 위치로부터 과거를 상상한다는 것이 이미 허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 세계에서 그러한 초월은 이미 그 효력을 잃었다. 대신 우리는 측정, 조사, 증거, 논리, 이성, 과학을 갖고 있다. 고대인들의 초월적 꿈에 내재된 광기의 어둠은 이성과 과학의 밝음에 의해서 축출 당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환상 역시 추방당했다. 환상의 원래 모습 그대로를 복원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될 때, 예술가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그 초월을 원래의 모습대로가 아니라 현대적 삶의 문맥 안에서 그가 상상할 수 있는 형태로 흉내내는(simulate)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발굴 장비들을 동원해서 땅을 파고, FRP 재질로 만들어진 개의 형상을 묻고, 영남대학교 발굴팀으로 하여금 묻혀있는 개의 형상들로부터 정보를 얻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인위적 고고학(artificial archaeology)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지층들 속에 숨겨진 의미의 층들이 인위적으로 놓여졌다는 의미에서 이 고고학은 인위적이다. 이런 행위들에서, 매장은 더 이상 초월적이지 않다. 그 안에서 발견될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사실, 이 프로젝트와 관련된 모든 것은 허구이다. 그러나 땅에서 발굴된 `역사적 증거'와 결합됨으로써, 그것은 철두철미한 진실까지는 아닐지라도 좀더 신빙성 있는 무엇이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허구적 역사를 직면하게 된다. 이 역사의 결정적인 증거는 영암(2000)과 경주 및 청도(2002)에서 발견된 개 모양의 철제 유물이다. 그는 파리의 주 드 폼므(Jeu de Paume)에서도 유사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이러한 발견들의 연속이 작가로서의 조덕현의 최근 족적을 채우고 있다. 현대 예술에서 작가가 어떤 생각을 담은 복잡한 설치작업을 기획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조덕현의 경우에서, 작가는 물질적 증거에 기반한 허구를 지어냄으로써 역사적 내러티브에 대한 대안을 찾는다. 영국의 역사가 스티븐 밴(Stephen Bann)이 자신의 저서 클라이오의 옷 입히기(the Clothing of Clio) 에서 언급했듯이, 19세기 실증주의에 토대를 둔 역사는 역사적 내러티브의 수사들의 다양성을 사실과 실제적인 것으로만 축소시켜 버렸다. 실증주의적 역사 이전에, 역사적 수사들은 전설과 연극, 소설, 신화 등과 같은 장르들을 두루 아우를 만큼 다채로웠다. 클라이오는 역사의 여신이다. 밴에 따르면, 클라이오의 옷들은 역사의 풍부한 수사들을 누르고 오로지 사실적 국면들에만 특권을 부여한 실증주의적 역사의 도래와 함께 형편없이 빈곤해졌다. 허구와 가짜 매장과 발굴이라는 형식을 이용함으로써 이서국 프로젝트는 역사적 과거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일깨우고자 시도한다. 그렇다면 그 경우, 이 과거는 누구에게 그 전모를 드러내게 되는가? 물론, 그것은 전체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총괄하는 책임을 맡은 작가 자신이다. 그러나 그는 이 프로젝트에서 전개된 모든 것들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유리한 지점에 서 있는가? 작가라는 위치는 자동적으로 그에게 시각의 권위를 보장하는가? 조덕현이 이서국 프로젝트에서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유리한 시점은, 그가 허구와 실재, 과거와 현재, 매장과 발굴 사이의 공간 어딘가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시점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이 프로젝트에서는 누구도 모든 것을 다 바라볼 수 있는 시점에 있다고 내세울 수 없다. 역사적 진실은 어떤 단일한 시점에도 속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작가는 여기서 발굴하는 사람이며, 진실을 마음대로 다루는 사람은 아니다. 그 결과로, 이서국이라는 허구의 왕국은 되살아난다. 롤랑 바르트가 저자는 죽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작가는 죽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 뿐이다. 그는 발굴터에서 파낸 의미의 잔존물들을 포착할 뿐이다. 그것들이 발굴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므로, 상상의 지역성은 아주 중요하다. 세 군데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발굴에서, 이서국의 내러티브는 현재 거기서 발견되는 사물들 속에 뿌리 박고 있다. 땅에서 파낸 철제의 개형상 뿐 아니라,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것은 더 있다. 그들 중의 하나가 이서국을 외부의 침입자들로부터 막아주었을 것으로 믿어지는 토성이다. 그것들은 바르트가 `실제효과'라고 부른 것을 강화한다. "`객관적인 역사'에서, `실재'는 아직 형상화되지 않은 기표일 뿐이며, 그것들은 겉으로 볼 때에는 아주 강력한 지시물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다. 우리가 실제효과라고 부르는 것을 특징 짓는 것은 이런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개념을 위해서 실제효과에 의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역사를 결을 거슬러서 읽을 것이다. 실제효과는 증거와 사실의 수준에 강하게 묶여 있으므로 그런 역사의 개념에 도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역사의 기표의 구축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의가 주어져 있을 때는 너무 늦는데, 기의는 기표의 구축이 다 끝난 다음에야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생각하는 다른 방식을 추구하는 상상력은 정당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세 가지 다른 장소에서 파낸 물건들은 증거가 아니라 역사의 굴곡진 경로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 볼 수 있는 계기들이다. 이 경로에 대해서는 바르트의 힌트를 빌려 보자. "역사적 담론은 실재를 따르지 않으며, 실재를 단지 표상(signify)할 뿐이며, 그런 일이 실재로 벌어졌다고 계속 되풀이하지만 이런 주장은 역사적 나레이션의 전과정의 표상된 `다른 측면'에는 절대로 도달하지 못한다." 결국, 조덕현이 다루고 있는 것은 역사의 실재라고 내세우는 의미화의 과정이다. 이서국 프로젝트는 역사적 상상력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 의미화의 물질적인 국면을 다룰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FRP로 된 개의 형상, 굴삭기로 파낸 흙, 그러면서 흘린 땀 등, 이 프로젝트에 동원되는 모든 재료와 물질들은 이서국의 역사적 나레이션의 잔존물들이다. 그것들은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 어딘가에서 비꼬여 있는 기묘한 역사적 개념 속에 재구축되어 있다. 이 비꼬임은 쉽사리 풀기 어려워 보이므로, 이서국 프로젝트는 관객에게는 난해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피로젝트의 시각적이고 텍스트적인 국면을 겪어 나가는 와중에서 관객이 단일한 시간의 개념으로부터 벗어날 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 다음 단계는 이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서국에 대한 허구적, 사실적 세부사항들은 이미 주어져 있지만 관객으로서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다.